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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와엍

[이그나스 베이튼] 가을 밤의 연가

와이어트 카펜더가 제대한 지도 몇 년이 흘렀습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만날 수는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으나 그런 기약 없는 만남을 조금이라도 상상하게 될 수 있었던 건 언젠가부터 오기 시작한 한 통의 편지 덕분이었습니다. 오늘도 그저 그런 날 중 하루였습니다. 전하지 않는 수많은 답장을 뒤로 하고, 새 편지의 답장을 쓰기 위한 편지지를 꺼내면 그리운 친구와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생각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탓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감정을 애써 찍어눌러 마음 한구석으로 쑤셔둡니다. 하지만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새어오는 가을바람이 마음 한구석을 묘하게 간지럽히고, 그 마음에 이끌리듯 손이 멋대로 움직입니다.


그 녀석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아직도 언젠가 나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할까.


…다음 편지는 언제나 올까.


가을의 밤공기가 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충동적으로 욕망을 담아 쓰고 있는 것일 테니까.


안녕.
여기는 아침에 한 번 비가 왔어.
이번 편지도 잘 받았어. 다음에도 이런 이야기들 더 적어줘. 나쁘지 않게 지내는 것 같아 보인다.
비도 오고 가을이라 그런지, 감기에 걸리진 않을까 싶을 만큼 추워졌네. 몸 잘 챙겨라.

여긴 아직 별다른 일이 없어. 또 갑자기 해외 파병 건에 관한 얘기가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런 건 여기다 말 못하지. 너도 알잖아, 군사기밀인 거. 농담이야. 또 외국으로 나가게 되면 내게 온 편지는 내가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할게.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그래도 그때그때 받아보고 싶으니까. 지금이야 네가 이렇게 편지를 보내주고 있지만 앞으로 우리가 만날 일은 없겠지. 그래도 나는 이걸로 만족할 거야. 이 편지가 네가 살아있다는 증표가 되고, 우리가 서로 다른 땅 위에 서더라도 같은 하늘 아래에 살아가고 있다는 걸 되새길 수 있으니까.

자꾸 내용이 길어진다. 오늘은 잠이 안 와서 그러니 이해해줘.
앞선 말에 실망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땐 이게 우리의 최선이야. 네 얼굴을 보면 내 입에서 무슨 말부터 튀어나올지 모르겠어. 우리가 함께한 지난 추억 중에 분명 좋은 것도 있었겠지만, 군인으로서의 네 길을 가로막은 것들 역시 떠올리게 되겠지.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네 흉터가 선명하게 기억나.

그래, 그때의 네가 기억나. 내가 기억하는 너는 우리가 아직 어렸을 때지만. 너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이런 말은 안 쓰려고 했는데… 어차피 이건 너 읽으라고 쓰는 편지가 아니라 내 일기 같은 거니까 그냥 적는다. 가을이라 그렇구나 하고 넘겨. 나는 정말 너를 못 보게 되더라도 괜찮았어. 하지만 이제는 네가 보낸 편지를 읽을 때면 네가 너무 그리워. 좋았던 추억들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아쉬워하게 돼.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떤 상처를 네게 줄지도 잘 알아. 다시는 그런 얼굴 안 보고 싶으니까. 그래서 너를 만날 수 없어. 아직은. 웃기는 일이지. 답장이 없는 편지를 계속해서 보낼 네 생각은 않고 내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래. 이미 네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네 소식을 받아보는 건 내 일과 중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야. 네 편지가 끊기면 나는 널 만나야겠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될 테지… 부디 다음에도 네 이야기를 적어 보내줘. 나도 힘내서 살아남을게. 네가 흰 국화를 들고 나를 만나러 올 일이 없도록 해야지.

각자의 삶을 살며, 우리 잘 살아가자.

이만 줄일게.


- 이그나스 베이튼.


힘주어 쓴 편지를 잘 접고 와이어트가 보낸 편지 위에 겹쳐 한 묶음으로 묶어둡니다. 평소처럼 집무실의 책상 서랍 제일 위 칸에 넣어두려던 찰나, 이것도 가을 밤바람의 영향일까요. 이유 모를 일말의 아쉬움에 서랍을 닫아 잠그고 서류 가방을 엽니다. 어차피 아무도 모를, 나만 알고 있을 가방의 내용물. 하나쯤은 부적처럼 들고 다녀도 괜찮겠지요.


이 마음을, 충동을. 기억해두고 싶어졌기 때문에.




사용한 잉크병 : 추워졌다, 같은 하늘, 추억, 당신을 위해 숨겨왔던 말,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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